이번 전시에서 전시 제목과 동명의 신작 <소멸>(2025)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영상 작업 <소멸>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부서져 흩어지고 사라지는 파도와 구름, 무지개 같은 제주 풍광이 등장한다. 역재생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느리게 흘러가는 화면에 익숙한 듯 이질적인 움직임이 가득하다. 빨려 들어가듯 뒤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결들, 화면 전체에 무질서하게 퍼져 있던 거품과 물방울이 점점 하나가 되어 모여 부서지기 전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뭉쳐진 것들을 계속 추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음 무너진 것들이 또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할 뿐이다. 영상을 아무리 많이 뒤로 돌려도 지나간 시간이, 가버린 대상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민병훈 작가는 본디 영화감독이다. 아들과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약속>(2023)이 그의 최근 대표작이었다. 이번 전시 마지막 공간에서 <약속>의 축약본을 감상할 수 있다. <약속>은 민병훈 작가가 아들 시우의 시를 징검다리 삼아, 제주의 자연 아래에서 슬픔을 머금고 살아가는 부자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민병훈 작가는 아내를 여의었다. 폐암에 걸린 아내가 여생을 제주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여, 아들과 함께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에 겨우 집을 마련했을 때 아내는 병환이 깊어져 서울의 병원에서 투병하다가, 결국 제주 집에 한 번도 머무르지 못했다. 그렇게 빈자리가 남아있는 제주에서 민병훈 작가는 아들과의 삶을 묵묵히 촬영하고, 제주 자연의 모습을 계속해서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 <약속>이 만들어지고, 후에 제주의 풍경과 무덤을 담은 시리즈가 이어지다가 2025년 <소멸>이 등장했다.
너무 많이 부딪히고 부서진 파도 속에는 작은 기포들이 수없이 떠올라 마치 크림처럼 보이게 되는 움직임이 생긴다고 한다. 사방으로 튕기는 파도의 에너지를 안고, 꾸덕해 보이는 기포 덩어리들이 일렁이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다시 뭉쳐진다. 역재생의 시간 속에서 화면 가득 흩뿌려졌던 것들은 하나로 돌아간다. 뒤로 돌아간 것들은 파열하는 에너지를 돌이켜 결국에는 소멸하는 곳으로 갈 것만 같다. 하지만 <소멸>에서 사라지는 것들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바다에서 물 밖으로 힘차게 뛰어올라 펄떡이는 물고기들, 눈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갈매기, 나무 사이를 의연하게 지나가는 까마귀, 숲속에 내리쬐는 햇볕을 가득 맞으며 제 짝을 찾아 흩날리는 날벌레들, 포근한 눈밭을 유유히 걸어가는 고양이가 계속 등장한다. 약동하는 생명들은 끊임없이 부서지는 자연을 딛고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맞이한다.
민병훈 Min byung hun (대한민국, b.1969)
민병훈은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을 졸업했으며 1998년 <벌이 날다>, 2001년 <괜찮아, 울지마>, 2006년 <포도나무를 베어라>로 토리노 영화제 대상, 코트부스 국제영화제 예술 공헌상,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 비평가상,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은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2013년 <터치>로 마리끌레르 영화제 특별상 수상 및 가톨릭 매스컴상을 수상과 함께 영상자료원 올해의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5년 함부르크 국제영화제와 상하이 국제영화제 등에서 <사랑이 이긴다>가 상영되었고, <펑정지에는 펑정지에다>는 전주국제영화제 및 실크로드 국제영화제 등에서 초청 상영 되었다. 생명의 관한 장편 3부작인 2018년 <황제>와 2020년 <기적>, 2022년 <팬텀>을 완성하였으며, 자전적 휴먼 다큐멘터리 <약속>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된 후 전국 극장 및 공동체 상영을 통해 개봉되고 있다. 또한 미디어 아트 개인전 2022 《영원과 하루》 청담 호리아트스페이스 갤러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2023) 제주 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 《I AM》(2023) 부산 뮤지엄 원, 《장면이 예술이 될 때》(2023) 부산 영화체험 박물관, 《치유의 숲》(2023) 인천 도시 역사관, 《보이지 않는 순간들》(2024) 산속등대 미술관, <나의 죽음은 나의 것>(2025)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I 등에서 전시하였다.
출처: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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