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사진미술관은 2012년부터 KT&G 상상마당과 함께 사진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작업의 완성도와 실험정신을 겸비한 신진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올해의 최종 사진가’로 선정된 성의석과 ‘올해의 사진가’로 선정된 김영경, 지원김의 작업을 소개한다.
올해의 사진가 3인은 제도나 사회적 통념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 삶과 이미지의 이동성과 전환, 동시대의 멸종 감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사진을 기록적, 확장적, 실험적 매체로 활용하여 과거의 기억-현재의 감각-미래의 징후를 연결한다.
지원김 〈Grand. Grand. Pa〉는 가족의 이야기를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과 포개어 풀어낸다. 사진, 편지, 엽서 등 개인 자료는 누렇게 바랜 종이에 다시 인쇄되거나, 앞뒤가 뒤집힌 채 제시된다. 이러한 방식은 통념을 무겁지 않게 전복하며, 기록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운 방향으로 유도한다.
작업은 독일에서의 10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며, 큰아버지의 유품과 대대로 내려온 가족 기록을 마주하면서 시작됐다. 대가족 안에서 늘 주변부에 머물렀던 막내딸의 위치는 오랫동안 유지돼온 가족사의 중심축을 살짝 비틀어보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전시장 초입부터 펼쳐지는 이미지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로 이어지는 남성 가장들의 기록을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낸다. 평양에서의 유년, 전쟁기 피난, 마산에서의 재정착, 서울로 이어진 이동의 궤적은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세대의 체온과 맞닿아 있다. 과거의 조각들은 사회가 남긴 흔적을 드러내는 동시에, 남성 중심의 가족 구조에 미세한 금을 낸다.
비슷한 감각은 슬라이드 프로젝터의 백색 소음 속에서 이어진다. 보도자료에서 발췌한 초상 위에 문구가 덧입혀진 사진은 인물과 사건의 의미를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익숙하면서 낯선 형상은 권위를 느슨하게 하고, 기록 너머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영역을 상상하게 한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우회적인 전달은 중심보다 주변에 머물며 관찰하고, 직접 발화하지 않고도 의미를 발생시키는 작가의 잔영과 같다.
김영경 〈흐르는 땅〉은 라이다를 예술적 매개로 전유한 레조그래피[1]를 통해 삶과 이미지의 이동성을 중첩하여 탐구한다. 여기서 ‘땅’은 물리적 토양이자 존재론적 터전으로서 매체를 의미한다. 작가는 시간의 변화가 삶의 전환을 이끌듯, 이미지를 둘러싼 조건의 변화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작업은 땅과 이미지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터의 이동과 전환’을 이야기한다. 판화, 사진, 레조그래피, 포토그래매트리, 3D 이미지, AI 이미지를 오가며 시대와 매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흐르는 삶'을 꾸준히 따라간다.
〈흐르는 땅〉은 사진의 존재론적 변화를 주된 질문으로 삼아 터의 전환을 사유한다. 작가는 허구적 발굴 서사를 상정하여 가속화되는 기술 환경 속에서 사진이 전환 중인 상태를 목격하고 재구성하는 매체로서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농부가 사라진 미래를 가정한 가상의 발굴은 종이죽으로 제작된 허구적 발굴지에서 수행되며 지(地)층의 기록을 넘어선다. 나아가 퇴적된 이미지의 층위 속에서 발굴되는 동시대의 이미지 생성론 아래, 발굴은 이미지의 지(紙)층을 파헤치는 행위로 심화된다.
〈땅에서 구름으로〉는 앞선 문제의식을 인간에서 기계로 이동하는 시각적 주체의 변화로 확장시키며, 새로운 터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시리즈에서 레조그래피는 인간의 시각에 기반한 재현을 넘어, 기계적 시각 체계가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인간에게는 추상적으로 인식되는 이미지가 기계에는 구체적인 좌표값과 정보로 기능하는 상황 속에서, 작가는 감각과 인지의 기준이 이동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다.
현재의 기록과 미래적 상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사진은 현재를 증언하는 동시에 이후의 시간까지 열어두는 매체가 된다. 김영경은 사진가로서 질문을 다시 세운다. 요컨대 작업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속성으로 확장된다. 이동과 전환에 대한 장편 서사를 통해 사진으로 미래를 말하는 한편, 사진이라는 매체의 미래 또한 함께 제시한다.
성의석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진가이자 한 개인이 느낀 불안과 무력감에 이미지 실험으로 호응한다. 급변하는 도시에서 홀로 정체된 채 사라질 듯한 감각은, 포착에 들인 시간이나 노동의 밀도와 무관하게 흘러가듯 소비되는 사진-이미지의 무력함과 닮아 있다.
작가는 이러한 감각을 시각화하기 위해 혼톨로지(Hauntology)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혼톨로지는 과거의 미학적 요소를 현대 디지털 기술로 재편집해, 향수와 불안이 뒤섞인 동시대의 정서를 만들어 내는 방법론이다. 작업에서 이는 사진, 우표, 그리고 AI를 통해 구현된다.
카메라는 녹물이 흐르는 낡은 오피스텔과 멈춰 선 복도를 비춘다.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삶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진은, 도시의 급류 속에서 지금은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장면이다. 한편, 고해상도로 스캔해 변형한 기념우표 도상은 과거에 꿈꾸던 밝은 미래가 도래한 현재를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이 담고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표 속 과거가 상상한 미래의 이미지가 한 화면에 겹쳐질 때, 현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AI는 앞선 두 매체를 섞어 시간이 뒤틀린 채 멈춰 있는 듯한 기시감으로 답한다. 관객은 라이트박스를 따라 익숙한 풍경 속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지점을 더듬으며, 작가의 정동에 서서히 가닿게 된다.
성의석의 작업은 단순히 이미지를 결합하는 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기록의 주체에서 입력값을 선택하고 결과를 관찰하며 편집하는 ‘샘플러’로서 동시대 사진가의 범주를 한 발 더 확장한다.
전통적 재현을 넘어 사진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가 3인의 작업은 고무적이다. 전시장의 느리고 조용한 호흡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진을 탐구하는 이들의 고군분투와 시선을 따라가보길 바란다.
고은사진미술관
[1] 레조그래피(Lazography)는 ‘laser’와 ‘-graphy’의 합성어로, 작가가 2020년에 고안한 용어이다. 라이다 기술을 예술적 매개로 재해석해 구축한 독자적 시각 형식을 일컫는다.
참여작가: 지원김, 김영경, 성의석